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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08월12일 22시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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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 100주년 선교기념관 터는 감검관 최봉인 장로 소유"
유가족에 백주년측 "법으로 하라" 분통
최지연 사모가 발제하는 모습

양화진 선교사 묘지 감검관 최봉인 장로에 대한 검증이 유가족을 비롯한 선교 전문가들에 의해 새롭게 조명되어지고 있다.

최봉인 장로는 이 땅을 복음화하기 위해 헌신한 선교사들의 묘지를 자신의 땅에 잠들게 하고 평생 관리해온 인물이다.

그에 대한 한국교회 선교사적 연구가 전무한 상태에서 유가족들의 발표는 한국교회 선교역사 전반에 큰 영향을 줄 것으로 보여 지고 있다.

조선인들 보다 조선을 더 사랑했던 선교사들이 잠들어 있는 양화진 100주년선교기념관 터가 서교동교회 설립 주역이었던 당시 감검관 최봉인 장로 소유였다는 증거와 함께 양화진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최봉인 장로 선교사업회12일 한국기독교연합회관 3층 그레이스 홀에서 양화진 역사 바로 세우기 공청회를 열고 언더우드, 아펜젤러, 헐버트 선교사 등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 선교사들이 안장되어 되어 있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의 100주년선교기념관 터는 분명 할아버지인 최봉인 장로의 소유다고 밝혔다.

공청회에서 최봉인 장로의 손자며느리인 최지연 사모(시애틀베다니교회샛별한국문화원 원장)는 이 같은 사실을 양화진 관련 기관들이 알고 있음에도 이를 숨기고 있다고 지적 했다.

최지연 사모는 '양화진의 바른 선교 역사와 선교관의 바른 사용을 위해'란 발제를 통해 최봉인 장로의 개인 소유였다는 증거를 찾고 최봉인 장로 기념사업회를 설립했다고 밝혔다.

최 사모는 기념 사업회가 생기면서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유일한 대지인 마포구 합정동 144의 집을 헐고 현재의 선교관을 지었다고 전제한 후살고 있던 최봉인 장로 후손들은 아무 보상 없이 밀려 났지만, 2012, 국가 외교문서 '외아문 일기'의 여러 곳에서 할아버지 최봉인 장로의 개인 소유였다는 증거를 찾았다면서 다툼을 피하기 위해 소유권을 갖고 있는 백주년 사업회의 상임이사 김경래 장로를 위원장으로 모셨다고 밝혔다.

최 사모는 세상적인 법적 대결보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 의가 나타나는 아름다운 해결을 위해 7년을 기다렸지만 돌아오는 건 말 바꾸기 뿐 이였다고 말했다.

증거와 관련 처음 189612월에 의정부찬정 외부대신 이완용이 내부대신 이재순에게 보낸 편지를 시작으로 당시 묘지회 회장 러시아 공사 위베르, 관할청장 홍현택, 내부대신 이재순 서리 윤봉구 등이 주고받은 편지를 제시했다.

이와 함께 18961031일에 독립신문에 '양화진을 외국인 묘지로 내어 준다'는 기사가 났고, 신문을 본 최봉인 할아버지가 묘지회 회장인 러시아 공사 위베르를 통해 국가로부터 자신이 산 집과 땅이 국유지가 아닌 개인이 산 땅임을 승인하고 후일을 위해 문서를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이완용에게, 이완용이 궁내부 내부대신 이재순에게 보낸 것을 밝혔다.

백주년 측에서 감검관이 아닌 묘직이라고 주장한 대해 최 사모는 이미 집은 허물어졌고, 집이 없는 상태다. 과거에 묘직이 살았다 해도 이후에 최봉인 할아버지가 동네 제일 크고 멋진 집을 지어 죽을 때까지 살았다면서 또한 1896년 당시에는 묘가 몇 개 없었고, 최봉인이 결혼 전에 땅을 산 것으로 추측한다. 결혼 전에 땅과 집을 샀고, 이미 노옥은 결혼 전에 허물어 졌고 빈 땅이었다고 밝혔다.

백주년측이 감검관이 산 땅은 100 자에 70자가 가까운 약간 세모난 땅이라 하였지만 관할청장 홍현택이 조사한 바로는 감검관이 산 것은 사실이나 둘레가 불과 수 십보 밖에 안 된다면서 상반된 이야기라고 표현한 문장에 대해 외국인들이 척간하는 자와 관할청에서 척간하는 보의 차이를 서로가 몰랐다면서 관할청 나졸들은 국가의 명이라 수천 평이나 수 만평이 되는 것으로 느꼈는지 수 십보가 너무 작았다고 반박했다.

최 사모는 “100자에 70자 는 약 200평이고, 1보가 182 센티이니 둘레가 50보이면 역시 200평 같은 크기다면서 실제로 1956년에 허물은 큰 집은 끝이 약간 좁아 약간 세모 모양이었다고 덧붙였다.

또한 최 사모는 백주년 측에서 주장하는 앞이 국유지라서 문장의 귀결이 애매 하다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 당시는 컴퓨터도 없던 시절이기에 문장을 정확하게 만들기가 어려웠다는 상황 설명에 불과 하고 문서마다 감검관이 샀다는 것은 승인 한다고 했다면서 원문에 '매득' 이라고 썼고 사들이 것은 사실이고 내부대신 이재순 (2년 후에 외부대신이 됨) 직인이 찍혀 있다고 반박했다.

최 사모는 특히 백주년 측의 주장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형편을 이해하지 못한 탓과 이미 노옥은 완전히 허물어져 없다고 적혀 있는데 '감검관이 샀지만 묘직이 살게 해 달라'는 과거에 감검관이 이완용에게 요구했던 것으로 노옥을 허물기 전에 묘를 관리하는 묘직이 최봉인이건, 누구이던 그 집에서 살았다면서 당시에는 묘가 몇 개 없던 때고 그 자리에 큰 집을 다시 짓고 평생을 살았던 최봉인과 후손은 땅을 산 감검관이 아니라고 단정하니, 신중하게 문서를 읽지 않았음이 증명 된 것이다고 주장했다.

백주년측의 감검관이 최봉인이라고 이름이 없다는 주장에 대해 최봉인이라는 이름이 없지만 양화진 묘지 관리는 최봉인이 죽던 1950624일까지 최봉인과 하인, 소작인들로 관리를 하였고, 마포구 합정동 14413개의 필지 중 유일한 대지로 그 땅에는 최봉인과 후손들만 살았고 다른 사람이 산 기록이 없다고 반박했다.

최 사모는 “1927520일자 '매일신보' 에는 '양화진 묘지는 옛날 이태왕 전하로부터 외국인들에게 지로 사용하라고 하사하신 것이니 그 묘는 보성전학교 교수 최등만씨의 부친 최봉인(65)씨가 약 삼십년 전부터 맡아서 간호하여 내려오는 중" 이라고 기사 내용뿐 아니라 선교사들 일기에 관리인 최봉인 이름이 여러 곳 등장한다고 말했다.

이 기록은 최봉인이 약 1895년 이전부터 묘지를 관리했으며, 당시는 묘가 별로 없었는데 1907년에는 묘지가 297개에서 1909년에는 464명으로 급격히 늘어난 것을 밝히고 있다.

193111월호 ‘The Korean mission Field’에 실린 홉스(Thomas Hobbs)선교사의 글(The Seoul Foreign cemetery ) "매달 급여를 받는 관리인이 그 위에 살면서 무덤들을 돌보고 있다.(The caretaker, who is paid a monthly salary, lives on the premises and and tends the graves )"고 기록하고 있다.

유가족측은 “18907, 헤론 선교사의 죽음으로 조정에서 730일에 양화진을 외국인 묘지로 허락하며 이틀 밭갈이 할 수 있는 땅을 사들이라고 명하여 합정동 145-3 김성옥의 땅을 40원에 인천 제물포 관세 받은 것으로 샀다면서 선교관이 서 있는 144는 양화진 13개의 필지 중 유일한 대지이자 묘지 감검관 최봉인 개인 소유였다고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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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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