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HOME신학/교육신학 


합동총회, 죽산 박형룡 박사 공적조서(1)
교단 발전과 위상을 세운 지도자들에 대한 공적연구 발표 세미나 발제문 전문

페이지 정보

한국교회공보 기자 작성일21-04-16 14:46

본문


◉ 생애개요
박형룡(朴亨⿓, 1897. 3. 28∼1978. 10. 25) 목사는 1897년 (음) 3월 28일에 평북 벽동에서 출생하여, 선친 신성중학교와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후에 중국으로 유학가서 남경 금릉대학교를 졸업했다(B.A. 1923). 그 후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신학사(B.D.)와 신학석사(Th.M.) 학위를 3년 만에 취득하였다(1923-1926). 당시 프린스턴에는 박사과정이 없었기 때문에, 남침례신학교에서 박사과정을 9개월 만에 수료하고 귀국하게 된다. 초기 정착 과정을 거쳐 1930년 평양 장로회신학교 임시교수가 되고, 1931년 4월에 변증학 교수로 취임하게 된다. 그 후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무기휴교에 들어가게 되는 1938년까지 교수 활동을 왕성하게 한다. 1938년에는 동경으로 건너가 표준주석 집필에 전념하며 은거생활에 들어갔고, 1942년 9월 만주 봉천에 세워진 신학교 교수로 초대받아 가서 처음으로 조직신학 전체를 강의하게 된다. 박형룡은 1947년까지 만주에서 머물다가 고신측의 초청으로 귀국을 하여 부산 고려신학교 교장에 취임하게 되었으나, 전국적인 총회의 지지를 받는 신학교를 세우기 위하여 상경한 후에 1948년 6월에 남산에 장로회신학교를 세우고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계승을 천명한다. 이후 박형룡은 1972년 2월에 75세로 퇴임하기까지 24년간 장로회신학교(장로회총회신학교- 총회신학교- 총회신학대학)의 조직신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수 많은 교단 목회자들과 양성하게 된다. 그의 주저는 1964-1973년 어간에 출간된 『교의신학』 전집 일곱권이 있다. 이는
한국 장로교 선교이래 한인 신학자에 의해서 출간된 최초의 조직신학 대계이다.
◉ 공적개요
- 박형룡은 선교사들이 설립한 한국 장로교회가 배출한 최초의 변증학자요, 조직신학자로서 평양 장로회신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많은 한인 목회자들을 길러 교단의 성장과 발전에 이바지했으며, 『기독교 근대 신학난제 선평』(1935)의 발간과 1935년 24회 총회 결정에 따라 표준성경 주석 편집 책임을 맡음으로 교단 신학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 근거한 정통 칼빈주의를 확고히 할 수 있도록 크게 기여했다.
 - 박형룡은 전쟁시기에도 열악한 환경이지만 만주 봉천신학원(후에 동북신학교로 개명)의 교수로 재직하며 교역자 양성을 위해 진력했고, 특히 이 시기에 벌코프의 조직신학 교본을 중심으로 조직신학 교과서를 쓰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조직신학 교과서는 해방 이후 총신의 신학 교재가 되고, 오늘까지도 신학의 표준적인 교과서로 인정받고 있다. - 박형룡은 1948년 남산에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고, 특별기도회 시간을 통해 5가지 교훈을 처음으로 공표했다. 이 신학교는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계승하는 학교임을 천명했다. 당시 조선신학교(김재준 목사)와 신학적인 갈등 속에 있던 교단은 박형룡의 이러한 용단에 힘입어 정통 개혁주의 신학을 가르치는 교단 신학교를 비로소 가지게 된다. 이 신학교는 1951년에 장로회총회신학교로 개명하고, 1959년 통합과의 분열 후에 총회신학교로, 1969년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대학으로 개명하게 된다.
- 박형룡은 24년간(1948-1972) 총신에서 조직신학 강의를 전담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그에게서 배운 수 많은 교단 목회자들의 신학적인 근간을 세워주는데 크게 기여를 했다. 그가 직접 교단 정치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많은 영향력있는 제자들을 통해 교단이 신학적으로 바른 방향으로 갈수 있도록 지도했다고 할 수 있다.
- 박형룡은 학교 행정 일선에도 앞장서서 어려운 시기마다 많은 수고를 했고, 나름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특히 그는 1953년에 2대 교장이 되어 전쟁 후 어려운 시기의 학교를 복구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고, 1954년에는 「신학지남」(1918년 평양 장로회신학교 기관지로 창간되었으나 1940년에 휴간)을 복간함으로 총신의 역사적 정통성을 천명하게 되었다. - 1958년 3천 만환 사건으로 교장직을 사임하게 되었고, 이 일로 교단 분열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통합측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박형룡은 일찍부터 W.C.C.의 통일 교회 수립에 대하여 비판을 함으로 교단 목회자들이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한 바른 판단을 할 수가 있도록 신학적인 지도를 하였다.
- 1959년 에큐메니컬 문제를 둘러싸고 통합과 합동이 교단 분열한 후에 박형룡은 다시금 총신의 교장으로 추대되었고(1960-1963), 1969년에는 7대 교장으로 추대되었는데, 그 해 문교부로부터 총회신학대학 인가를 받게 됨으로 초대 학장이 되어 1972년 2월까지 재임하게 된다. 12년간의 이 시기는 교단 분열후 에 합동이 고신과 연합했다가 다시금 분열되는 일이나 사당동에 교사 마련과 같은 중대한 일들이 있었는데, 박형룡은 자신의 맡은 소임을 다하여 어려운 시기를 앞장서서 잘 헤치고 나갔다.

◉ 공적상세
- 박형룡은 평양 장로회신학교 교수(1930-1938)로 재직하면서 많은 목회 후보생들에게 변증학, 기독교 윤리, 현대신학, 그리고 성경 과목들을 가르침으로 정통 개혁주의 신학을 일찍이 장로교회의 정체성이 되도록 하는 일에 기여한 바가 크다. 특히 1935년에 출간한 『기독교 근대 신학난제 선평』은 847쪽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로서, 당시 마포삼열을 비롯한 선교사 교수들도 하지 못했던 신학적 쾌거였다. 이 저술을 통하여 19세기 자유주의 신학과 20세기 초반 현대신학의 동향과 문제점들을 낱낱이 밝히고 개혁주의 신학과 무엇이 다른지를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을 장로교 목회자들에게 제공했다. 이러한 대작에 힘입어 해방 이후 조선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정규오, 차남진, 신복윤 등 51인 학생들은 김재준의 성경관에 문제가 있음을 밝히 깨닫고 저항의 목소리를 낼 수가 있었다.
- 평양 장로회신학교 재직 시절 박형룡은 또한 1935년에 개최된 총회에 『창세기』 저자 문제와 여권 문제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에 기여하였다. 위원장은 라부열이었으나, 보고서는 박형룡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5년 24회 총회 결정에 따라 표준성경 주석 편집 책임을 맡음으로 교단 신학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 근거한 정통 칼빈주의를 확고히 할 수 있도록 크게 기여했다. 그래서 일찍이 김양선 목사는
『한국기독교해방10년사』에서 다음과 같이 적실하게 논평을 해준바가 있다: “초대 선교사들의 보수 신앙에 기초하여 확립된 한국교회는 제일 희년에 이르러서는 한인 보수주의 신학자에 의하여 지도되고 있음이 역연하게 되었다.”(189).
- 박형룡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반대의 목소리를 내다가 후일을 기약하기 위하여 동경으로 건너가 표준 주석을 편집하는 일에 전념하면서 은거 생활을 했다(1938-1942). 그러다가 1942년 9월에 만주 봉천신학원(후에 동북신학교로 개명)의 교수로 초빙되어 국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소수이지만 개혁파 정통 목회자들을 양성하기에 진력했다. 이 시기에 박 목사는 처음으로 조직신학 전 분야를 홀로 가르쳐야 했는데, 그는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의 조직신학(1932, 1941)을 교본으로 삼아 강의안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가 전수받은 영미 장로교 신학에 벌코프를 통한 카이퍼와 바빙크의 화란 개혁주의 신학을 조화롭게 종합함으로 그 자신이 명명한 “한국형 청교도 개혁신학”의 틀을 만들어 내었다. 해방 이후에도 이러한 방향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강의안을 십수년간 증보한 끝에 『교의신학』 전집(전7권; 1964-1973)을 출간하기에 이른다.
- 박형룡은 부산 고려신학교의 초청을 받아 1947년에 험난한 여정을 통해 남한에 입국해서 처음에는 고려신학교 교장직에 취임했다. 오로지 그의 소망은 정통 개혁신학으로 무장된 교역자를 양성하여 자유주의 물결에 대항하고, 후대 교회를 만세반석위에 세우고자 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고신이 전체 교단의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되자, 총회가 인정하는 전국적인 신학교를 세우기 위하여 1948년에 상경하여 총회 여러 원로들과 협력하여 6월에 남산에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였다. 박형룡은 이 학교가 1938년에 무기한 휴교에 들어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계승한다고 역설했고, 6월 9일에 가진 신학교 특별기도회 시간을 통해 오늘날 총신의 교훈이 되는 5훈(訓)을 처음으로 공표했다(경영자가 되라[후일 신자가 되라로 바뀜], 학자가 되라, 성자가 되라, 전도자가 되라, 목자가 되라). 아무튼 당시 조선신학교(김재준 목사)와 신학적인 갈등 속에 있던 교단으로서는 박형룡의 이러한 용단에 힘입어 정통 개혁주의 신학을 가르치는 교단 신학교를 비로소 가지게 된다. 이 신학교는 1951년에 장로회총회신학교로 개명하고, 1959년 통합과의 12 총회역사위원회 ․ 제105회총회기념사업특별위원회(총회훈장상훈위원회)
분열 후에 총회신학교로, 1969년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대학으로 개명하게 된다.
- 박형룡은 24년간(1948-1972) 총신에서 조직신학 강의를 거의 홀로 전담하다 시피했기 때문에, 그에게서 배운 수 많은 교단 목회자들의 신학적인 근간을 세워주는데 크게 기여를 했다. 장신의 이종성 교수는 통합 총회장을 한 것에 비해, 박형룡은 직접적으로 교단 정치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길러낸 수 많은 제자 목회자들을 통해 교단이 신학적으로 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지도했다. 일찍이 박형룡의 신학 강의를 통해 우리 교단은 영미 개혁주의와 화란개혁주의 신학을 조화롭게 종합한 아름다운 신학 전통을 가지게 되었고, 바른 신학과 바른 삶의 실천의 균형을 강조하고 실천하는 전통을 수립하게 되었다. 선교사 시대에는 19세기 말-20세기 초 미국 학생 자원운동(SVM)의 영향을 받은 관계로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무분별하게 전파하는 사례가 많았으나, 박형룡의 지로 덕분에 역사적 전천년설로 방향을 잡을 수가 있게 되었다.
- 박형룡은 학교 행정 일선에도 앞장서서 어려운 시기마다 많은 수고를 했고, 나름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특히 그는 1953년에 2대 교장이 되어 전쟁 후 어려운 시기의 학교를 복구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고, 1954년에는 「신학지남」(1918년 평양 장로회신학교 기관지로 창간되었으나 1940년에 휴간)을 복간함으로 총신의 역사적 정통성을 천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계간지는 1959년 통합과 교단 분열할 때에도 총신이 지켜내었고 오늘날까지도 본 신학교의 기관지로 남아있다.
- 1958년 3천 만환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박형룡은 신학교 교장직을 사임하게 되었는데, 통합측은 이것이 교단 분열의 주요한 원인이라고 주장하지만, 교단 분열의 주요 원인은 W.C.C.에 대한 찬반 문제가 더 주요했다는 점을 간과할 수가 없다. 또한 총회 내에 지역별, 계파간 분열도 크게 한몫했다는 점도 부수적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 어려운 시기에 박형룡 목사는 일찍부터 W.C.C.의 실체와 동향에 통일 교회 수립이라는 목표에 대하여 비판을 함으로 교단 목회자들이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한 바른 판단을 할 수가 있도록 신학적인 지도를 하였다(박형룡, “에큐메니컬 운동의 교리와 목적,” 「신학지남」 1958년 6월호).
- 1959년 에큐메니컬 문제를 둘러싸고 통합과 합동이 교단 분열한 후에 박형룡은 다시금 총신의 교장으로 추대되었고(1960-1963), 1969년에는 7대 교장으로 추대되었는데, 그 해 문교부로부터 총회신학대학 인가를 받게 됨으로 초대 학장이 되어 1972년 2월까지 재임하게 된다. 12년간의 이 시기는 교단 분열 후에 합동이 고신과 연합했다가 다시금 분열되는 일이나 사당동에 교사 마련과 건축이라는 중대한 일들이 있었는데, 박형룡은 자신의 맡은 소임을 다하여 어려운 시기를 앞장 서서 잘 헤치고 나갔다. 이 시기는 경제적으로도 많이 힘든 시절이라 교수 급여가 몇 달씩 체불되기도 하던 시절이었으나, 박형룡과 다른 교수들은 인고(忍苦)하며 기도로 버텨내고 자신의 소임에 최선을 다했다.
- 박형룡이 본 교단에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중요한 직접적인 통로는 일찍부터 설교나 강연을 통해 현장 목회자들과 수 많은 교인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는 숭실전문 재학 시절부터 설교자로 초빙을 받아 다녔고, 1921년 숭실전문 졸업 후 전도여행 중에 목포에서 전한 “천의 검”이라는 설교 때문에 10개월 동안 목포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만큼 그의 설교는 일찍부터 교인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 박형룡은 평양 장로회신학교 교수 시절에도 산정현교회 강단이나 여러 강단에서 설교를 했고, 길선주 목사 장례나 손양원 목사 장례와 관련해서도 설교자로 세움받기도 했다. 특히 1950년 한국 전쟁 기간 동안 박형룡은 부산 초량교회에서 열린 교역자 수련회에서 11번이나 설교를 하면서, 회개와 화합의 메시지를 외쳤다. 그리고 총회가 목사장로기도회를 개최하기 시작한 이래 여러 차례 강사로 세워지기도 했다. 그의 모든 설교들은 『박형룡 박사 저작전집』 18-20권에 수록되어 있다. - 박형룡의 공적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박형룡은 일찍이 신학교육에 뜻을 두고 신학 공부에 전념했고, 그 후 남은 생애를 평양, 만주, 부산, 대구, 서울 등지에서 자신의 전공인 변증학과 현대신학 그리고 조직신학 강의를 했다. 이러한 강의를 통하여 수 많은 장로교 목회자들이 정통 개혁주의를 배우고 익힐 수가 있었고, 그들이 목회현장이나 선교현장에서 수고함을 통해 교단은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다. 그의 신학적인 영향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라도 직간접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매년 강도사 고시의 조직신학 문제의 표준적인 자료는 여전히 박형룡이 쓴 조직신학 전집이기 때문이다. 또한 총회나 총신의 정체성 문제를 토론하거나 자문할 때 마다 우리는 역사적 개혁주의를 생각하게 되고, 일찍이 이 신학
전통을 열변했던 죽산 박형룡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는 현실이다. 최근에는 박형룡의 교의신학 전집이 중국어로도 번역되고 있는 상황이어서 신학적인 선교에도 기여를 하고 있다는 점도 고무적이다. 우리 교단이 현재의 수 많은 난제들을 잘 해결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웅비하기 위해서는 죽산 박형룡 목사와 선대가 확집하고 전해준 역사적 개혁주의라는 “옛적 선한 길”로 다시금 일심으로 돌아가는데 있음을 자각하며 이 조서를 마치고자 한다.
◉ 근거자료
김양선. 『한국기독교 해방 10년사』. 서울: 종교교육부, 1956.
김요나. 『총신 90년사』. 전3권. 서울: 총신대학교출판부, 2003.
박아론. 『나의 아버지 박형룡』.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2014.
박용규. 『한국장로교사상사』. 서울: 총신대학출판부, 1992. _____. “한국교회 종말신앙: 역사적 개관.” 「성경과신학」 27 (2000): 190-222. _____. 『한국기독교회사1-3』. 서울: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04-2018. _____. “박형룡 박사의 생애, 저술활동, 신학사상 (1928-1960).” 「신학지남」 340 (2019): 49-98.
박형룡. 『박형룡박사 저작전집』. 전20권. 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77-1983.
100년사편찬위원회 편. 『총신대학교 100년사』. 전3권. 서울: 총신대학교출판부, 2003.
백년사편찬위원회 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100년사』. 전2권.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2006.
이상웅. 『박형룡신학과 개혁신학 탐구』. 서울: 솔로몬, 2019. _____. “3. 1 운동 100주년에 즈음하여 다시 보는 박형룡박사의 초기 생애(1897-1923).” 「신학지남」86/3
(2019) : 5-37. _____. “박형룡박사 기념도서관 명명(命名)의 의의와 과제.” 「신학지남」 86/4 (2019): 235-259. _____. “죽산 박형룡의 경건한 생애와 경건 이해.” 「한국개혁신학」 65 (2020): 148-184.
장동민. 『박형룡의 신학 연구』.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8. ______. 『박형룡-한국 보수신앙의 수호자』. 파주: 살림, 2006.
정성구 편집. 『박형룡박사 회고록』. 서울: 총신대학출판부, 2011

SNS 공유하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Category
Facebook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KakaoTalk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