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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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공보 기자 작성일23-01-30 17:23본문
이은선 교수(안양대 교수)
I. 들어가는 말
2023년 새해가 밝아왔다. 2023년은 세계적으로 경제적인 위기가 다가올 것이라고 많은 전문가들이 전망하고 있다. 경제적인 위기가 다가올 때, 그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한 나라들은 위기 후에 국가가 더 성장하고 지도력을 발휘하게
된다. 2008년 미국발 세계 금융위기가 발생했을 때, 중국이 값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싼 물건들을 공급하며 세계의 공장으로 등장하여 경제성장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중국은 2010년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
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2023년의 경제위기는 다시 한 번 세계의 지도력의 변화를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
대한민국은 이러한 위기의 시기에 다시 한 번 해방 후의 혼란기에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건설하여 국가 발전을 기틀을 마련하였던 이승만 건국 대통령의 리더십을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시기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좌우 대
립이 극심하던 해방 후 한반도 상황에서 미군정과 협력하면서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건국하였다. 건국한 후에 당시 가장 시급한 개혁과제였던 토지개혁을 성공적으로 진행하여 근대국가 국민를 형성할 수 있었다. 건국 2년만
에 맞이했던 한반도 공산화를 목적으로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의 위기를 유엔군의 도움을 받아 물리치면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였다. 그리고 그 전쟁을 마무리하면서 다양한 외교수단을 동원하여 1954년에 미국과의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국가의 안보를 튼튼히 하였다. 미국과의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를 완전하게 구축하여 대한민국의 발전의 토대를 굳건하게 구축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전민국에게 초등
학교 의무교육의 거의 완전한 실시를 통해 교육혁명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그의 리더십을 통해 구축된 대한민국은 그 이후 박정희 시기의 발전의 토대를 구축하였다.
II.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확립
해방을 맞이하였을 때, 한반도는 일본군 무장해제를 목적으로 북한에는 소련군이 진주하였고, 남한에는 미군이 진주하였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이미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의 비밀지령에 따라 북한에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하
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46년 2월 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고, 3월에는 무상토지 몰수와 무상경작권 분배를 실시하였다. 북한에서는 소련군의 지원을 받으면서 김일성을 중심으로 국가건설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던 반면에, 남한
에서는 미군정이 언론의 자유를 허용하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면서 우파와 좌파의 대립이 극심하게 나타났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1945년 10월 16일 귀국한 이승만은 이미 1945년 9월 6일에 박헌영을 중심으로 조선인민공화국을 건설한 좌익세력들이 그에게 제공했던 주석직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남한 내의 모든 세력들을 모아 독립촉성중앙
협의회를 조직하였다. 이승만은 독촉중협을 구성할 때, 공산당을 포함한 좌파세력까지 포섭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좌파세력이 이승만의 주도 하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고 1945년 11월 말에 독촉중협에서 이탈하자 12월 17일에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을 통해 공산당에 대한 거부 의사를 명확하게 하였다.
1945년 말에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를 결정하자, 국내에서 1945년12월 28일부터 김구는 임시정부세력이 중심이 된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구성하고 반탁을 주도하여 국내정치의 주도권을 잡으려 하였다. 이 때 김구는 미
군정으로부터 국가통치권을 빼앗으려고 시도하며 미군정관리들에게 총파업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은 김구의 무모할 정도의 이러한 권력찬탈시도에 강력하게 제동을 걸었다. 미군정은 이 사건을 계기로 임정의 법통성과 정부로서
의 위상을 한층 단호하게 부인하였다. 미군정은 이후 ‘임정의 해체와 새로운 정당으로의 재편’계획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이승만은 따라서 미군정의 흐름을 주시하는 가운데 반탁운동을 전개하고 2월 1일에 조직된 비상정치국민회의
에서 28명으로 선출된 최고정무회의가 2월 14일에 남조선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으로 개편되자 의장이 되었다. 2월 8일에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를 조직하면서 국내정치 세력 가운데 주도권을 잡아나갔다. 1946년 3월 20일부터 시작된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5월 6일 실패로 끝나자, 이승만은 미소공위회가 아닌 유엔을 통한 정부수립 시도를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946년 12월 방미를 하였고, 미국의 정치지도자들에게 유엔을 통한 한반도 문제 해결을 주장하였다.
결국 미국도 1947년 5월에 시작된 제2차 미소공위가 실패로 끝나자 9월 17일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였다. 이 때부터 이승만은 총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운동 전개하였고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통해 198명의 국회의원이 선출
되었다. 7월 12일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48년 8월 15일 대통령중심제의 민주공화국을 건국하였으며, 유엔에서 12월 12일에 한반도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과 협력을 통한 정부수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명확하게 인식하였고, 그러므로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세력들을 규합하여 총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이승만은 혼란한 해방 후의
국내 정세 가운데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의 명확한 청사진을 가지고 일관되게 활동하여 이 목적을 성취하였다.
III. 탁월한 국제 정세의 흐름에 대한 인식
이승만 리더십의 가장 중요한 자산 가운데 하나는 국제정세의 흐름에 대한 탁월한 식견이다. 이승만은 미소공위를 통한 한국정부수립운동이 미소의 이데올로기적인 대립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조야에 대해,
유엔을 통한 한반도 문제 해결을 주장하였다. 당시 이러한 이승만의 주장은 국제정세의 흐름과 배치된다고 평가할 수도 있었다. 2차 대전 직후 미국정부는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소련과의 협력하에 국제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정책 방향에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수정자본주의도 상당히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루즈벨트는 대공황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정 부분 공산주의자들이 시행하던 계획경제를 도입하여 경제공황을 극복하였다. 그리고 루즈벨트는 소련을
자신이 통제하면서 국제질서를 구축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였다. 그러나 루즈벨트가 1945년 4월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부통령으로 대통령이 되었던 투르먼은 루즈벨트보다 공산당에 대해 훨씬 더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 소련은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했으나, 이미 미국과 영국 등의 연합국이 자신들의 정책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간파하고 독자적인 이익추구의 길로 나서고 있었다. 그러므로 2차 세계 대전을 마무리 하는 과
정에서 점차로 민주주의 국가들과 공산독재 국가들 사이에 대립이 시작되는 냉전이 태동하고 있었다. 이것이 구체화되어 나타난 것이 1947년 3월에 발표된 트루먼 독트린이었다.
이승만이 이미 우리나라에서 1차 미소공위가 실패한 후에 미소공위를 통한 한국문제 해결이 어렵다고 느꼈고, 그래서 1946년 12월에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문제의 유엔이관을 주장하였다. 당시에 이승만의 주장은 미국 정가에서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많은 비판자들은 이승만이 트루먼 독트린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주장하고, 냉전으로의 정책 전환이 우연의 일치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이승만이 트루먼 독트린의 정책 결정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
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국제적인 흐름이 그러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읽었고, 그것을 주장한 점에서 탁월한 리더십을 가졌다. 이것은 『일본내막기』에서도 보여주었던 이승만의 통찰력이고 정세판단능력이었다.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어 이승만이 예견한 방향으로 정책이 전개되었다.
그와 동시에 국제연합의 중요성에 대한 그의 인식이었다. 미소의 대립으로 미소공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때, 이승만은 국제연합의 중요성을 이해하였고, 그래서 국제연합을 통한 한국문제 해결을 추구하였다. 이것은 2차대
전 이후의 국제질서가 국제연합을 중심으로 형성될 것을 예견하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는 프린스턴 박사과정에서 국제정치학을 공부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국제적인 감각과 판단능력을 갖추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IV. 농지개혁을 통한 근대시민사회의 토대 확립
해방 후 남한의 경제인구의 70%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고, 농업종사자의 대부분인 80%가 소작농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농지 개혁의 배경에는 북한이 1946년 3월에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성과를 선전하고 있었고, 남한 국
민의 대다수를 구성하고 있던 소작농들을 경자유전의 원칙에 입각한 자작농으로 변화시켜 사회경제적인 안정을 꾀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정헌법은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한다는 원칙을 선언하였다. 이승만정부는 북한의
무상몰수 무상토지경작권 방식을 반대하고 유상매입 유상분배 방식을 채택하였다. 이에 따라 1949년 6월 농지개혁법이 제정되었으나, 정부의 개정요청으로 1950년 3월 개정법률안에 통과되어 시행되었다. 법률내용은 1인당 소유상한선
을 3정보로 하였고, 농민이 부담하는 보상지가와 국가가 지주에게 지급하는 상환지가를 동일하게 연생산량의 150%로 하였으며, 보상방식과 상환방식을 동일하게 5년 균분 연 30%로 정하였다.
이승만은 토지 개혁에서 지주층이 중심이 되었던 한민당과 결별하였다. 많은 나라들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하였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그 이유는 토지개혁의 집행자들이 토지소유자들이었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는 개혁을 하였기 때문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승만은 정부수립과정에 자신에게 협력했던 지주들이 중심이 된 한민당과 농지개혁에서
만은 분명하게 거리를 두었다. 그는 농지개혁을 실시하는 책임자로 공산주의자였다가 전향하여 정부수립에 참가했던 혁신계인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으로 임명하여 추진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1948년 4월 15일에 120만호에게 42만 정보의 토지분배를 완료했다고 발표했다. 당시 이승만은 보리파종기 이전에 농지개혁을 시행하여 실질적으로 70-80%의 농지가 분배되었다. 그리고 1949년 46%에 이르던 소작
률은 농지개혁이 단행된 1950년에 5%로 하락하였다. 이렇게 농지를 분배받은 농민들은 6.25전쟁과정에서 자신의 토지를 지키기 위하여 북한군과 싸워서 나라를 지켰다.
이러한 농지개혁은 한국사회에서 여러 방면의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첫째는 소작지주제가 철폐하고 경자유전의 자작농 체제가 성립되었다. 한국은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소작 및 지주제도를 철폐하였다는 점에서 전 세계적으로 가
장 성공적인 농지개혁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둘째는 자작농체제가 성립되면서 개인의 토지소유권에 기초한 자본주의 사회가 성립되었다. 또한 농지분배를 통해 농민들은 재산을 소유한 근대민주사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었다. 셋째로 농
지개혁을 통해 양반지주계급이 소멸되어 양반제도가 소멸되었다. 넷째로 농민들에 대한 토지 분배는 소작농들을 자작소농으로 전환시켜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막고 반공국가로 발전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북한공산당은 6.25남침 후
에 점령지에서 북한식의 토지개혁을 실시하였으나, 농민들의 호응을 거의 얻지 못하였다.
이승만은 농지개혁 과정을 통해 한민당과 분명하게 결별하였고, 조봉암을 발탁하여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농지개혁을 통해 토지자본가와의 분명한 결별을 하였고 산업자본의 형성을 시도하였다. 지주들은
농지개혁의 대가로 농지증권을 받았으나 5년간 분할상환을 받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상환과정은 6.25전쟁으로 상당기간 지연되었고 그 결과 많은 중소지주들은 대부분 몰락하였다. 따라서 많은 농지증권이 헐값으로 방매되었다. 그
리고 일제가 만들었던 귀속재산들을 불하받은 산업자본가들은 이 농지증권으로 불하대금을 지불하게 하락을 받았다. 그리하여 이승만은 농지개혁을 통해 토지 자본가와 결탁하지 않고 산업자본가와 테크로크라트와 결탁하여 산업자본에 기
초한 경제체제를 추구하였다.
V. 6.25전쟁과 한미동맹을 통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로의 편입
1949년 미군이 철수하고 남한이 군사적 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에서 북한이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아 한반도 공산화를 시도한 것이 6.25전쟁의 주요한 원인이었다. 1949년 3월 3일, 소련을 방문한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군
사적 공격(남침)을 언급했고 스탈린은 미국의 개입 가능성으로 들어 반대했다. 그러나 1949년 10월 1일에 중국 본토가 공산화되면서 완강했던 스탈린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미국은 1950년 1월 12일에 한반도를 제외한 극동방위
선인 애치슨라인을 발표하였다. 1950년 1월 30일, 스탈린이 슈티코프 소련대사에게 전보를 보냈는데, 이것이 김일성의 군사계획에 스탈린이 최초로 동의를 표시한 전보였다. 2월 15일, 모택동이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스탈린은 모
택동에게 의견을 물었고 모택동은 “우리는 당연히 김일성을 도와야 한다”라고 대답하였다. 모택동은 3월 20일, 인민해방군 소속 조선인 병사 중, 14,000명을 집결시켜 독립 15사단으로 개편하여 북한으로 파병하였으며, 이 부대는 전쟁시
에 인민군 제12사단이 되었다.
김일성은 1950년 4월 10일, 박헌영과 같이 모스크바를 비밀리에 방문하여 스탈린을 만났다. 이때 미군의 전쟁 참전 여부에 관련해서 김일성은 네 가지 이유를 들어 미국이 참전할 수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첫째, 기습적인 공격으
로 3일 이내 승리를 확보할 수 있다. 둘째, 20만 명의 조선 공산당원의 봉기가 있을 것이다. 셋째, 남한 각도의 유격대가 조선인민군을 지원할 것이다. 넷째, 미국은 참전을 준비할 시간이 없다. 스탈린도 애치슨 미 국무장관의 1월 12일
연설(애치슨 라인)에서 미국이 한반도 문제에 불간섭 태도를 보일 수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소련의 스탈린과 모택동의 후원을 약속받은 김일성은 1950년 6월 25일 남침을 하였다. 그러므로 6.25전쟁은 3개국 공산주의 정권의 공
모 속에서 한반도를 공산화로 통일하려는 침략전쟁이었다.
이러한 전쟁에 대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6월 27일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적절한 군사조치를 취할 것을 결의했고, 7월 7일 유엔군사령부를 설치하게 되었다. 그 이후 유엔군의 후원 하에 인천상륙작전 성공, 서울 탈환 등을
거쳐 북진이 이루어졌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가 이루어진 후에 2년여의 휴전 협상을 거쳐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주장하고 반공포로를 석방하며 미국에게 전쟁 이후 남한
의 안전보장을 요구하였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된 직후인 8월 8일 서울에서 변영태 외무 장관과 덜레스 미국무장관 사이에 가조인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10월 1일 워싱턴에서 정식으로 조인되고, 1954년 11월 18일 발효되었다. 한미상호방위조
약에 따라 2개 사단의 미군이 휴전선 근처에 배치되어 인계철선을 구축하여 전쟁을 방지하여 지금까지 한국의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VI. 자유주의 시장경체제의 확립 –1954년의 발췌개헌을 통한 사회주의 요소 제거
이승만은 제헌헌법에 들어있던 근로자의 이익균점권, 주유 산업의 국공유제 같은 사회주의적인 요소를 제거하면서 미국의 경제지원을 얻기 위한 자유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구축하였다. 이승만은 1952년 2대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투표
를 통해 재선되었다. 그리고 1954년 선거에서 여당인 자유당이 승리하자 제2차 헌법개정을 추진하였다. 3대 국회의원 선거는 여당과 야당이 정당공천제를 시행한 첫 번째 선거였다. 그리고 자유당은 헌법개정을 중요한 이슈로 제기하
여 선거를 치렀는데, 203석 가운데 114석으로 압승하였다. 그런데 이 헌법 개정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이승만의 연임제한을 폐지하여 장기집권을 도모하기 위해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없앤다”는 조항을 두고 있었다. 이와 함
께 이승만은 대통령 직접 선거에 이어 통일을 비롯한 국가 중대 사안을 국민투표로 결정하고자 하였다. 특히 당시에 유엔과 미국이 이승만 대통령의 뜻과 달리 휴전협정을 추진하고 있었으므로 국민투표로 그러한 사안을 결정하고자 하
였다. 그리고 내각제인 요소를 제거하여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헌법개정 과정은 1952년의 1차 개정이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 이루어졌던데 반해, 2차 개정은 토론이란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헌법개정안은 1954년 11월 27일 국회에서 표결에 붙여 재적 국회의원 203명 가운데
135명이 찬성하여 1명의 정족수가 모자라 부결 선포되었다. 그렇지만 자유당은 다음 날 사사오입이란 편법을 사용하여 헌법개정안이 가결되었다고 선언하였다.
그리하여 이 헌법개정을 사사오입개정이라고 부른다. 이 헌법개정은 초대 대통령의 중임제한을 폐지하여 이승만의 장기집권의 길을 열었다는 부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이승만의 입장에서는 강력한 대통령제를 확립하여 국가건설을 추진하려는 의도를 관철시켜 나간 측면도 있다. 2차 헌법개정을 통해 첫째는 이승만의 미국식 직접민주주의 제도가 도입되었다. 통일을 비롯한 국가 중대사안과
관련한 직접선거제도가 도입되었다. 둘째는 경제제도에서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익균점제라는 사회주의 요소를 폐지하고 자유주의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였다. 제헌헌법에 들어있던 이익균점제와 같은 사회주의적인 요소들에 대해 미
국의 막대한 원조를 받기 위해 폐지하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은 경제제도에서 자유주의 시장경체체제를 구축하여 앞으로의 경제발전의 토대를 구축하였다. 셋째는 정부가 입법권과 예산권을 장악하고 의회의 권한을 약화시켰다. 1954년의
헌법개정을 통해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와 자유주의 시장경제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정치제도의 발전에서 초대 대통령의 임기제한을 철폐하여 장기집권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민주주의 발전의 저해요소로 작용하였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