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샤프의 '기독교 역사' 3권, 니케아 및 니케아 이후 기독교 시대(A.D. 311-600) 서평: 노예제도에 대한 교회의 입장과 사회 개혁
김형석 기자 기자
작성일 2026-10-08 09:01
본문
필립 샤프(Philip Schaff, 1819-1893) 박사의 역작 '기독교 역사' 제3권, '니케아 및 니케아 이후 기독교 시대: A.D. 311-600'(출판사 미상, 출간일 미상)은 초기 기독교의 복잡다단한 사회적, 신학적 지형을 탐구하며 특히 당시 사회의 근간을 이루었던 노예제도에 대한 교회의 태도와 그로 인한 사회 개혁의 양상을 심도 있게 조명한다.
샤프 박사는 19세기 독일계 미국인 개혁주의 신학자로,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기독교 역사 전반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기독교 역사' 시리즈는 방대한 분량과 깊이 있는 분석으로 오늘날까지도 기독교 역사 연구의 중요한 참고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본 3권은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이후부터 600년까지, 교회가 제국 내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신학적 체계를 정립해가는 과정을 상세히 다룬다.
이 책에서 샤프 박사는 당시 사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였던 노예제도에 주목한다. 그는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통해 노예 제도가 여전히 합법적인 제도로 인정받고 있었음을 지적한다. 법전은 인간의 자연적 평등을 선언하며 아리스토텔레스의 특정 인종 및 계급이 영구적 노예 상태에 처하도록 운명 지어졌다는 이론을 넘어서려 했으나, 노예의 법적, 사회적 지위를 여전히 열등하게 취급하고 혼인을 비하하며, 자녀에 대한 권리를 박탈하고 가축처럼 사고팔 수 있는 존재로 격하시켰다고 분석한다. 노예의 매매는 당시 일상적인 거래였으며, 그 가격은 노예의 나이, 건강, 기술 등에 따라 책정되었다. 야만족의 법전 역시 로마법과 크게 다르지 않게 노예 제도를 인간의 보편적인 조건이자 거래 가능한 상품으로 인식했다.
전쟁 포로는 대량 학살을 면하는 대신 노예로 전락했으며, 이는 때때로 노예 가격을 폭락시키기도 했다. 해적 행위 역시 인신매매를 포함하는 시스템의 일부였다. 샤프 박사는 앵글로색슨족이 교황 그레고리오 대교황 시대에 로마에서 자유롭게 팔려 나갔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당시 노예 무역의 실태를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고대 교회는 노예와 자유민 간의 혼인을 엄격히 금지하는 법률을 유지하면서도, 노예 간의 결혼에 대해서는 성경적 근거를 들어 합법성과 종교적 신성함을 인정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노예와 자유 시민을 분리하는 법적 장벽을 약화시키려는 시도였으나, 완전히 허물지는 못했다. 교회는 인간의 도덕적, 종교적 평등을 가르쳤지만, 주교와 고위 성직자 중에도 노예 소유주가 존재했으며, 교황청 역시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음이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501년 로마 시노드에서 교황 심마쿠스의 반대자들이 그의 노예들을 증인으로 소환하려 했던 사건은 당시 노예의 법적 지위와 증언권 부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노예와의 혼인 및 도망 노예에 대한 엄격한 법률을 제정했지만, 동시에 노예 해방을 촉진하고, 성직자가 별도의 절차 없이 노예를 해방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테오도시우스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노예 해방을 더욱 장려했으며, 유스티니아누스는 노예로의 형벌을 폐지하고 해방된 자에게 시민의 지위와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노예 신분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제거하려 했다. 이러한 법률들은 점진적인 노예제 폐지를 향한 움직임을 반영한다.
그러나 샤프 박사는 당시 교회가 노예 제도의 완전한 폐지를 요구하거나 원하지는 않았다고 지적한다. 이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교회는 노예에 대한 인도적이고 기독교적인 대우를 강조하는 데 만족했다고 분석한다. 이는 당시 사회 구조와 경제 시스템에 깊숙이 뿌리내린 노예 제도를 단기간에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어려웠던 현실과, 교회가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본서는 이러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기독교가 사회 개혁에 미친 영향과 그 한계를 균형 있게 조명하고 있다.
샤프 박사는 19세기 독일계 미국인 개혁주의 신학자로,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기독교 역사 전반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기독교 역사' 시리즈는 방대한 분량과 깊이 있는 분석으로 오늘날까지도 기독교 역사 연구의 중요한 참고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본 3권은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이후부터 600년까지, 교회가 제국 내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신학적 체계를 정립해가는 과정을 상세히 다룬다.
이 책에서 샤프 박사는 당시 사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였던 노예제도에 주목한다. 그는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통해 노예 제도가 여전히 합법적인 제도로 인정받고 있었음을 지적한다. 법전은 인간의 자연적 평등을 선언하며 아리스토텔레스의 특정 인종 및 계급이 영구적 노예 상태에 처하도록 운명 지어졌다는 이론을 넘어서려 했으나, 노예의 법적, 사회적 지위를 여전히 열등하게 취급하고 혼인을 비하하며, 자녀에 대한 권리를 박탈하고 가축처럼 사고팔 수 있는 존재로 격하시켰다고 분석한다. 노예의 매매는 당시 일상적인 거래였으며, 그 가격은 노예의 나이, 건강, 기술 등에 따라 책정되었다. 야만족의 법전 역시 로마법과 크게 다르지 않게 노예 제도를 인간의 보편적인 조건이자 거래 가능한 상품으로 인식했다.
전쟁 포로는 대량 학살을 면하는 대신 노예로 전락했으며, 이는 때때로 노예 가격을 폭락시키기도 했다. 해적 행위 역시 인신매매를 포함하는 시스템의 일부였다. 샤프 박사는 앵글로색슨족이 교황 그레고리오 대교황 시대에 로마에서 자유롭게 팔려 나갔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당시 노예 무역의 실태를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고대 교회는 노예와 자유민 간의 혼인을 엄격히 금지하는 법률을 유지하면서도, 노예 간의 결혼에 대해서는 성경적 근거를 들어 합법성과 종교적 신성함을 인정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노예와 자유 시민을 분리하는 법적 장벽을 약화시키려는 시도였으나, 완전히 허물지는 못했다. 교회는 인간의 도덕적, 종교적 평등을 가르쳤지만, 주교와 고위 성직자 중에도 노예 소유주가 존재했으며, 교황청 역시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음이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501년 로마 시노드에서 교황 심마쿠스의 반대자들이 그의 노예들을 증인으로 소환하려 했던 사건은 당시 노예의 법적 지위와 증언권 부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노예와의 혼인 및 도망 노예에 대한 엄격한 법률을 제정했지만, 동시에 노예 해방을 촉진하고, 성직자가 별도의 절차 없이 노예를 해방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테오도시우스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노예 해방을 더욱 장려했으며, 유스티니아누스는 노예로의 형벌을 폐지하고 해방된 자에게 시민의 지위와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노예 신분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제거하려 했다. 이러한 법률들은 점진적인 노예제 폐지를 향한 움직임을 반영한다.
그러나 샤프 박사는 당시 교회가 노예 제도의 완전한 폐지를 요구하거나 원하지는 않았다고 지적한다. 이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교회는 노예에 대한 인도적이고 기독교적인 대우를 강조하는 데 만족했다고 분석한다. 이는 당시 사회 구조와 경제 시스템에 깊숙이 뿌리내린 노예 제도를 단기간에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어려웠던 현실과, 교회가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본서는 이러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기독교가 사회 개혁에 미친 영향과 그 한계를 균형 있게 조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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