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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백스터의 아내 마가렛, 신앙의 여정을 통해 본 '그리스도의 신부'의 삶

김형석 기자 기자
작성일 2026-10-07 09:00

본문

도서 표지

17세기 영국, 격동의 시대를 살아낸 신앙인 마가렛 백스터(Margaret Baxter)의 삶이 조명되고 있다. 그녀는 당대 최고의 목회자 중 한 명이었던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의 아내로서, 개인적인 고난과 사회적 박해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신앙과 헌신으로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삶을 살아낸 인물로 평가받는다.

이 이야기는 1655년, 부유하고 경건한 미망인 메리 해머(Mary Hanmer)가 리처드 백스터의 사역을 돕기 위해 잉글랜드 서부의 외딴 마을 키더민스터로 이주하면서 시작된다. 당시 백스터 목사의 사역으로 키더민스터는 술주정과 폭력이 난무하던 곳에서 기쁨의 찬양으로 가득한 공동체로 변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역에 동참하기 위해 이주한 메리 해머와 달리, 그녀의 반항적인 십대 딸 마가렛은 키더민스터의 빈곤과 황량함에 염증을 느끼며 백스터 목사의 설교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마가렛은 변화의 씨앗을 품게 된다. 1642년부터 1651년까지 영국을 휩쓴 내전으로 큰 고통을 겪었던 마가렛은, 평화가 찾아오자 자신을 즐기고자 했다. 당시 그녀는 지역 주민들보다 높은 사회 계층 출신이었기에, 이 농촌 직조 공동체에는 어울리는 교제가 없었다. 이에 마가렛은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화려하게 치장하기도 했다. 어머니 메리 해머는 딸의 영적 현실에 대한 무관심을 안타까워했지만, 마가렛은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백스터 목사는 항상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죽어가는 사람처럼' 설교하며, 그의 설교를 듣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지역의 모든 가정을 방문하며 회개를 촉구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마가렛은 자신도 모르게 이기심, 교만, 허영심, 그리고 하나님을 경시하는 태도에 대한 깊은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는 반항적인 십대 소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경건한 추종자로 변화하는 과정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마가렛의 태도가 부드러워지면서, 그녀는 이웃의 빈곤을 경멸했던 것을 회개했다. 성경 읽기와 기도에 시간을 투자하기 시작했으며,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새로운 열망을 기록했다. 사후에 발견된 그녀의 개인 일기에는 20세 때 작성한 '자기 심판 문서'가 담겨 있었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사람의 열 가지 표지'를 언급하며, 각 표지에 대해 자신의 죄를 기록하고 아직 그리스도의 영을 온전히 소유하지 못했음을 한탄했다.

이 시기 마가렛은 치명적인 질병에 걸렸다. 지역 사회 많은 이들이 그녀의 생명을 위해 금식하며 기도했고, 하나님은 놀랍게도 그 기도를 들으셨다. 회복 후 마가렛은 교회가 감사할 일곱 가지 '큰 은혜'를 열거하며, 여러 긴급한 기도 요청을 보냈다. 그녀는 더 큰 겸손, 부드러운 양심, 시험을 이길 힘,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내실 다른 시련을 견딜 온유함을 구했다. 또한 마가렛은 사후에야 발견된 비밀스러운 '하나님과의 언약'과 일련의 결심 사항들을 작성했다. 그녀는 "나는 이제 전능하신 하나님과 나의 언약을 갱신하고, 그의 은혜로 나의 영혼에 그의 자비에 대한 새로운 감각과 나의 죄에 대한 더 큰 감각을 얻고 유지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결심한다"고 기록했다.

1660년 찰스 2세가 왕위에 복위하고 영국 국교회가 복원되면서, 백스터 목사는 더 성경적인 방향으로 교회를 이끌고자 런던으로 이주했다. 메리 해머 역시 백스터 목사의 사역을 돕기 위해 키더민스터에 머물렀으나,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어 딸 마가렛과 함께 런던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몇 달 후 메리 해머가 사망하면서 마가렛은 홀로 남겨졌다.

이때까지 백스터 목사는 결혼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는 목회에 헌신하면 가정의 요구를 충족시킬 여력이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1662년 통일법(Act of Uniformity)이 제정되어 성직자들에게 청교도적 특성을 부인하도록 요구하자, 백스터 목사는 사역에서 물러나야 했다. 독신 생활의 명분이 사라지자 그는 1662년 9월 10일, 47세의 나이로 23세의 마가렛과 결혼했다. 당시 백스터 목사는 생계 수단이 없었으나, 마가렛은 상당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주변의 수군거림에도 불구하고 마가렛은 매우 행복해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박해와 불확실성을 마주했지만, 진정한 복음 안에서의 동반자 관계를 누렸다. 부부는 궁핍한 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고자 하는 열정을 공유했다. 마가렛은 일상생활의 실질적인 부분들을 돌보며 리처드가 저술 사역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왔다. 백스터 목사는 아내의 지혜를 높이 평가하며 자주 그녀의 판단을 구했다. 그는 "내가 평생 만난 어떤 신학자들보다 양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그녀가 더 뛰어났다. 나는 종종 그녀에게 어려운 문제들을 제시했고, 그녀는 즉시 해결책을 제시하여 나의 결단에 약간의 간과가 있었음을 깨닫게 했다"고 회고했다.

마가렛은 좋은 문학 작품을 나누고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 자신의 재정 자원을 기꺼이 사용했다. 그녀와 리처드는 이웃을 집으로 초대하여 리처드가 비공식적으로 말씀을 전하게 했다. 이는 불법적인 활동이었으나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1669년 6월, 리처드가 체포되어 6개월 형을 선고받았을 때, 마가렛은 감옥에 함께 들어가기를 고집했고, 친절한 간수는 그들에게 별도의 방을 제공했다. 그들은 조기에 석방되었으나, 비국교도 목회자들이 이전에 사역했던 장소로부터 5마일 이내로 접근하는 것을 금지하는 악명 높은 5마일법(Five Mile Act)으로 인해 런던 외곽에 거주해야 했다. 1672년 국왕이 관용 선언(Declaration of Indulgence)을 발표하면서 비국교도들의 상황이 다소 완화되었다. 마가렛의 남은 생애 동안 그녀는 남편의 사역을 지지하고 격려했다. 그녀는 자신의 재산을 사용하여 남편이 설교할 건물을 빌리고, 심지어 예배당 건축 비용까지 지불했다.

결혼 생활 19년 동안 리처드와 마가렛 모두 건강 문제로 고통받았다. 그들은 의식적으로 영원한 삶을 염두에 두고 살았다. 1647년, 백스터 목사는 심각한 질병을 겪은 바 있다. 이들의 삶은 개인적인 고난과 사회적 박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정체성을 구현하며, 후대에 깊은 신앙적 울림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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