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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턱의 신자들', 교회의 본질을 묻다

한국교회공보 기자
작성일 2026-07-02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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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신학자가 명명한 '문턱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은 한국 교회에 '가나안 성도'라는 이름으로 이미 익숙한 현상이다. 신앙은 있지만 교회는 떠나는 이들의 증가는, 현대 교회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도전 중 하나다. 이 현상을 단순히 개인의 신앙적 나태함이나 세속화의 영향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이는 교회가 과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언약 공동체로서의 본질을 제대로 구현하고 있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문턱의 신자들'이 거부하는 것은 신앙 자체가 아니라, 생명력을 잃고 관료화된 '제도'로서의 교회다. 그들은 진정한 영적 교제(코이노니아)와 삶의 변화를 갈망하지만, 오늘날 많은 교회가 제공하는 것은 단지 종교적 서비스의 소비에 그치고 만다. 주일의 예배 참석이 신앙의 모든 것인 양 축소되고, 성도 간의 깊은 영적 교제와 권징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이러한 '명목상의 기독교'는 영적 갈증을 느끼는 영혼들에게 더 이상 매력적인 답을 주지 못한다.

19세기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는 그의 저서 『기독교에 대한 공격』에서 당시 덴마크의 국교회 시스템을 '기독교 세계(Christendom)'라 칭하며 맹렬히 비판했다. 그는 모두가 세례를 받고 자동으로 기독교인이 되는 사회 속에서, 신앙은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는 값싼 문화적 습관으로 전락했다고 통탄했다. 키르케고르에게 '기독교 세계'는 오히려 사람들이 참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방해하는 거대한 기만이었다. 그가 보기에, 안락하고 존경받는 '기독교 세계'의 시민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 십자가를 져야 하는 예수의 제자와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문턱의 신자' 현상은 21세기판 '기독교 세계'의 파산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다.

해법은 문턱을 낮추어 그들을 다시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다. 해법은 교회가 본질로 돌아가 문턱 자체가 무의미할 만큼 매력적인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이다. 말씀이 살아 움직이고, 성령의 역사가 뜨거우며, 성도들이 서로의 삶을 진실하게 나누고 책임지는 언약 공동체를 회복해야 한다. 가시적 교회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지만, 그 불완전함 속에서도 거룩을 향한 치열한 몸부림이 있을 때, 교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안식처가 된다.

히브리서 10장 24절과 25절은 교회의 본질을 명확히 선언한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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